주보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1821-1846, St. Andrew Kim

김대건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1882년 충청남도 내포 솔뫼(당진)에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김제준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 할아버지는 50세때 천주교에 입교, 계속된 천주교의 박해로 여러 차례 고초를 겪다가 1718년 옥중에서 순교했다. 이에 김대건의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으로 이주하였다.

아버지 또한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1839년 기해박해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이 같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자란 김대건은 1836년 (헌종2) 프랑스 모방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뽑혔다. 김대건은 최양업, 최방제등과 함께 마카오의 파리 외방 선교회에서 프랑스어, 라틴어, 중국어, 신학, 그리고 철학등 새로운 학문을 두루 공부를 마친 김대건은 기해박해 이후로 탄압이 계속 되고 있는 우리 나라로 들어오려 했으나 두 번이나 실패되었다.

1845년 1월 비로소 국경을 넘어 한양에 몰래 들어왔으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매우 거세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해 8월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음으로써 김대건은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신부가 된 김대건은 프랑스의 페레올, 다블뤼 주교와 함께 상하이를 떠나 충청남도 강경으로 몰래 숨어 들어왔다. 그리고 방방곡곡을 돌면서 비밀리에 전교활동을 펼쳤다.

김대건은 이듬해 동료 선교사들이 국내로 들어올 수 있는 비밀 입국통로를 알아보기 위해 백령도를 돌아보다가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김대건은 몇몇 대신들의 부탁으로 옥중에서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만들었다. 또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번역하기도 했다.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심한 고문을 받다가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김대건은 신부들과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긴 뒤 서울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김대건은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로 천주교에 대한 모진 박해를 무릅쓰고 천주교 교리와 문화를 전파하다가 죽은 순교자이다. 김대건 신부는 1984년 한국 가톨릭 20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에 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우리 나라 순교자 102명과 함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김대건 성인 연보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이냐시오)과 고우르술라의 장남으로출생.

1836년 4월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받은 뒤 신학생 후보로 선발.

1836년 12월 3일

앞서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토마),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를로) 등의인도를 받아 변문으로 출발.

1836년 12월 28일

조선 입국을 위해 요동에 머루르고 있던 샤스탕(Chastant,鄭)신부 댁에 도착.

1837년 6월 7일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대표;Libois신부)에서 칼레리(M.Callery)신부 등에게서 수학.

1837년 8월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1838년 겨울 귀환)

1841년 11월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다시 마닐라로 피신(11월에 귀환)

1841년 11월

최양업과 함께 철학 과정 이수, 신학 과정 입문.

1842년 2월 15일

메스트를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대 세실 함장의 에리곤호에 탑승하여 마카오를 출발

1842년 10월 26일

요동의 백가점(白家店)도착. 최양업,메스트로 신부와함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감.

1842년 12월 27일

조선교회의 밀사 김 프란치스코 상봉.

1842년 12월 29일

변문 출발. 의주를 통해 조선에 귀국(1차 귀국)

1842년 12월 31일

압록강을 다시 건너 중국측 변문으로 감.

1843년 3월

변문으로 나가 조선교우와 접촉한 뒤 백가점으로 귀환 (2차 탐색)

1843년 4월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

1844년 2월 4일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북방 입국로 탐색을 우해 훈춘으로 출발(4차 탐색)

1844년 3월 8일

훈춘을 거쳐 조선에 귀국(2차 입국), 경원에서 조선교우 상봉.

1845년 1월 1일

조선교우와 상봉하여 조선에 귀국(3차 입국)

1845년 1월 15일

서울 도착. 돌우물골(석정동)에 유숙.

1845년 4월 30일

선교사 영입을 위해 현석문(가를로)등 11명의 조선인교우들과 함께 제물포 출발(6,4 상해 도착)

1845년 8월 17일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

1845년 8월 24일

상해에서 약 30리 되는 만당 성당에서 첫 미사.

1845년 8월 31일

페레올 주교,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Raphael)호를타고 상해 출발.

1845년 10월 12일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

1846년 5월 14일

서해해로를 통한 선교자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주교의 지시를받고 교우들과함께 마포를출발.

1846년 6월 5일

체포됨

1846년 6월 9일

해주 감영으로 압송.

1846년 6월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

1846년 8월 29일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회유문 작성.

1846년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음.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

1846년 10월 26일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해 미리내에 안장됨.

1857년 9월 23일

가경자로 선포됨.

1901년 5월 18일

유해를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성당으로 이장.

1925년 7월 5일

시복됨.

1949년 11월 15일

한국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결정. 로마 교황청에서 7월 5일을 김대건 신부 축일로 정함.

1960년 7월 5일

시복됨.

1984년 5월 6일

시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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